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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0 기차는 7시에 떠나네 10

기차는 7시에 떠나네

기차는 7시에 떠나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신경숙 (문학과지성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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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할 때는 소설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냥 행복하고 가벼운 마음은 소설속의 인물과의 공감을 느끼기에 어려움을 느낀다. 우울할 때 혹은 외로울 때, 마음이 공허할 때 소설을 집어든다. 나를 비워내는 만큼 소설속의 인물을 나 자신에 가깝게 생생하게 느낀다. 너무나도 우울하던 주말 우연히 읽기 시작한 이 책은 왠지 모를 큰 위로가 되었다. 소설 속에서 처절하게 자기 자신의 과거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과 동행해서 함께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다. 너무 큰 슬픔은 생존을 위한 자기방어로 그 슬프고 괴로운 기억을 서서히 자신의 머리속에서 밀어내서 다시 떠오르지 않게 밀봉해 버렸다. 무표정하고 건조한 서른 다섯살 여자는 비슷한 무게의 슬픔을 겪은 스무살의 여자와 동행해 자신의 과거를 향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그 과거와 다시 조우했다. 우울하고 외롭게 섬처럼 떠도는 소설속 인물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중에서도 서로에게 배려하고, 따뜻한 온기를 나눈다. 깊은 절망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고 희망을 보는 건 사람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살아간다. 이렇게." 

나도 하린처럼 굶고 지친 어린 짐승의 새끼처럼 외롭고 힘들때 찾아가 따뜻한 죽 한그릇을 내어주고, 쓰다듬어 주고, 이불을 내어주고 쉬어가게 하는 윤같은 친구가 있다면, 그리고 그런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깍아내리지 않을 사람이 나에겐 몇이나 있던가.

이 책을 읽으니 주인공들의 외로움의 파장이 나에게 오히려 위로가 된다. 소설속의 인물들은 어려움을 겪지만, 세상과 가족 친구들로부터 완전히 내쳐지지는 않는다. 견디고, 살아간다. 사람은 다 비슷하게 느끼고, 비슷하게 괴로우며 사는 건 아니겠니.. 견뎌보렴.. 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나아가려고 애쓴다. 그거면 족하다.



마음에 와 닿은 구절들을 끄적거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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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땐 20대가 되면, 20대 땐 30대가 되면 막막하고 불안한 마음이 치유되리라, 생각했거든. 무엇인가 든든한 것이 생겨서 아슬아슬한 마음을, 늘 등짝에 멍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마음을 거둬가주리라. 그렇게 부질없이 시간에 기댔던 것 같아. 20대의 어느 대목에선가는 20대가 참 길다고 생각하기도 했지. 격정은 사라져도 편안해지리란 이유로 어서 나이를 먹었으면 했어. 서른이 되면, 혹은 마흔이 되면 수습할 길 없는 좌절감에서는 빠져나오지 않겠는가. 살아가는 가치 기준도 생기고 이리저리 헤매는 마음도 안정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쯤이면 어느 소용돌이에도 휘말리지 않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지지 않겠는가."
"그런데요?"
"어리석었어. 무슨 생각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기댔을까? 시간은 밤에 문득 잠이 깨서 그저 가만히 누워 날을 새게 하거나, 현재진행형의 일들을 문득 지워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버리게 하거나 했을 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평화로워지기는 커녕 이제는 무슨 일을 시작해서 실패를 하면 그 실패의 영향이 내내 앞으로의 인생에 상처로 작용하게 될 것 같아 살얼음판을 딛는 것같이 조심스러워. 어쩌면 인간이란 본래 이런 것일까? 본래 어느 구석이 이렇게 텅 비어 있고, 일생을 그 빈 곳에 대한 결핍을 지니고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일까?"
그가 나를 깊이 껴앉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내 옆에 있었으면 해.... 당신과 함께 있는 이런 분위기가 좋아. 정서적으로 안정이 돼."
그가 나를 더 깊이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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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등에서 번져나오는 온화한 불빛. 벽면에 그려지는 윤과 나의 실루엣. 내 코에 부벼지는 윤의 따뜻한 어깨. 후욱, 들이쳤다 멀어지는 빗소리.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살아진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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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청춘의 한때를 기억하지 못한 채 서른다섯이 되는 동안 여기저기 마음이 상하고 지치기도 했지. 기억을 저버린 채 세상은 변하지 않고 돌아간다. 달콤한 잠에 빠졌다가도 빗소리나 고독한 건물의 검은 그림자 같은 것에 잠이 깨면 어김없이 중얼거리곤 했지. 한발짝만 더 나아가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잃어버린 기억으로부터... 청춘 시절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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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자꾸나. 흰 모래 위 햇빛 아래 서 있는 미란을 나는 담싹 업었다. 외로웠는가. 미란은 얼굴이 납작해질 정도로 내 등에 얼굴을 대고 문질렀다. 잊으려고 하지 말아라. 생각을 많이 하렴. 아픈 일일수록 그렇게 해야 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잊을 수도 없지. 무슨 일에든 바닥이 있지 않겠니. 언젠가는 발이 거기에 닿겠지. 그 때, 탁 차고 솟아오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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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애는 마음에 불이 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의 저 불이 붙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를 너무 사랑해서 그만 상하게 할 것이다. 그때까지 이 애는 드럼스틱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두들기며 견딜 것이다. 그러다가 언젠가 미란은 지난 여름날의 나처럼 갑자기 드럼을 손에서 놓고 잃어버린 얼굴들을 찾아 헤맬 거다. 무성 영화 같은 기억의 시간들을 찾아 거슬러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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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할 만큼 마음이 몹시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따금 나는 내 삶이 필름이 들어 있지 않은 카메라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 결락감이 무엇인지를 당신께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뭐라고 말해야 하나요. 언젠가 무슨 일로인가 지독하게 헤어지기 싫은 무엇과 억지로 헤어져서 여기로 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해도 될까요. 너무나 피투성이로 헤어져서 아직도 그 피가 마르지를 않은 것 같다고. 당신의 청혼은 그 헤어짐을 상기시켰어요.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를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이 아직도 그의 수첩에 나의 이름을 적어가지고 지니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이렇게 생생하게 간직한 채 당신과 결혼할 수는 없다는 게 내 마음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나는 지난 날의 몇개의 조각들만 가지고 되돌아오게 될지도 모르지요. 더 단편적이 되고 더 종잡을 수 없게 될 지도. 하나 나는 여전히 당신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몹시 흔들립니다. 늘 당신과 닿고 있고 싶은 내 마음은 여전합니다. 당신을 믿고 당신을 의지하는 마음은 사실입니다. 당신과 닿아 있지 않으면 너무나 막막해서 고아같은 기분조차 듭니다.
  나는 무슨 일로인가 어느 부분이 훼손된 인간이에요.
  그런 인간이 지니고 있는 나약함을 어떻게 설명할까요. 당신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순간들은 늘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합니다. 내가 그토록 끈질기게 당신이 어디에 있는가, 를 알고 싶어하는 건 다시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지금 당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나의 행복이었습니다. 내 부친이 가평에서 사향노루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었어요. 생각으로라도 그렇게 당신과 닿아 있지 않은 순간엔 우리들의 관계가 곧 사라져버릴 것 같은 염려가 들곤 했습니다. 지금도 당신과 나의 자취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끔찍하게 합니다. 꼭 붙들고 놓지 않으면 소멸을 막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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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언니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게 피아노를 쳐주었다.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어느 날 처녀가 되어가던 언니는 어린 나를 무릎에 앉히고 물었다.
 "이 소리가 널 덜 슬프게 하니?"
 나는 고갤 끄덕였다. 언니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머리에 빗질을 해주었다.
 "슬퍼하지마... 물 속에 하늘이 비치듯이 그저 네 마음에 뭔가 비칠 따름이야. 네 마음이 물과 같이 투명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은 하지마. 널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어른이 되면 그래서 네 마음에 다른 것이 비치게 되면 그 땐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지지 않아도 그때는 그 힘으로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을거야. 그때까진 너와 나만이 아는 비밀이야."
 불타는 듯한 노을이었다. 나는 언니의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그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밝고 아름다운 노을은 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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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사람이 그랬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 그 때가 내가 가장 외로운 때였지요, 라고. 나도 그래. 내가 뭔가를 물끄러미 응시하거나 손가락으로 한 가지 동작을 계속하고 있을 때 그런 때가 내 마음이 외로운 때야."
"그러면 좀 나아?"
"아니... 그냥 외로우니까 그러구 있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으니까 말로도 안되고 손으로도 안되고 도리 없이 주저 앉아 있거나 바라볼 수 밖에 없으니까."
"이모만큼 나이가 들어도 그래?"
가끔씩 차창에 달라붙던 빗방울이 갑자기 세졌다. 빗방울은 이제 빗물이 되어 주르륵 흘러내린다. 빗소리가 솨아 밀려들었다가 사라지곤 한다. 회오리바람이로도 부는 것일까? 빗소리가 확 밀려갈 때마다 차 안은 갑자기 고요해진다. 외로움에 나이가 무슨 소용인가. 서른 다섯. 몸속의 습기가 메말라가는 나이. 만남도 이별도 새롭지 않고 처음 만나는 사람조차 언젠가 한번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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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이 텁텁하다. 내가 못먹겠다고 숟갈을 죽그릇 속에 내려놓자 윤이 다시 숟가락을 가져가서 뽀얀 죽을 소복이 담아 내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댄다.
"어디에선가 읽으니까 마음이 어지러울 때, 성이 날 때... 그럴 때 따뜻한 음식이 좋은 약이래. 성도 가라앉히고 마음도 차분하게 하고 그런더는군."
"........"
"조금만 먹어... 내 성의를 봐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성이 날 때?
"가끔 생각해. 네가 곁에 없었으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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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과 헤어지고 그 남자와도 더는 만나지 않았어. 인생은 거기서 끝난 걸로 치고 덤으로 살자, 했어.. 그런데 야릇하지. 작년부터 이 세상 어디서도 나를 깎아 내리지 않을 거라 여겨지는 사람은 현뿐이었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
윤은 바스락거리며 빗물처럼 웃었다.
"어디에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깎아 내리지 않을 사람, 내 편인 사람을, 그런 사람을 두 사람만 가지고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그렇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지. 그 사람과 네가 있으니까."
 나?
 매번 너에게 달려와 따뜻한 음식만 먹고 가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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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꾹 눌러쓴 글씨로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여라, 하고 씌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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